그 남자의 살림, 그 남자의 가방 by mimimarcel

나는 남성성에 매료당한다. 이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국에 대한 동경과 고향을 향한 향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듯하다. 어떤 남성에게서 남성성을 목격하면 나와는 다른 것을 볼 때 갖게 되는 신기함과 내가 비롯된 곳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인간이란 여성과 남성에게서 유전자를 받아 태어나지만 어디서 얼마큼의 여성성을, 혹은 남성성을 물려받았는지 정확히 알기 힘들다. 대개는 어머니의 손으로 길러지지만 성을 물려받은 아버지의 핏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라게 된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보면 내가 비롯된 지점이 반드시 생물학적인 나의 아버지로 국한되었다는 생각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나라는 개인이 형성되기까지 영향을 미친, 과거에 살고 통치하고 뭔가를 쓰고 짓고 만들고 사유했던, 존경하는 여러 남성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남성성은 매혹적이다. 

한 심리학자는 크게 세 가지로 남성성을 규정했다. 첫 번째로 힘, 즉 신체적, 정서적인 강인함, 용기, 자립심, 공격성 등을 들었고 두 번째는 영예, 즉 책임감, 충성심, 성실함, 타인을 보호하고 자원을 조달하는 이타적 성향, 세 번째는 집단적인 성격으로 경쟁심, 야망,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등이 있다고 했다. 현대에 들어와 남녀의 역할이 겹치게 되면서 남성성은 그 개념 자체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이는 여성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는 어떤 남성은 비가 많이 오면 어떤 지역이 침수되지나 않았는지 차를 타고 동네를 돈다고 한다. 이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남성성인데 요즘은 참 구경하기 힘든 것이 되었다. 그럼 나는 일상적으로 어디서 남성성을 느낄까. 참으로 사소한 삶의 장면들, 그러니까 남자가 양복을 입고 자리에서 일어서 악수를 하는 모습이라든지, 서류 가방을 들고 뚜벅뚜벅 일터로 출근하는 모습에서 어떤 원형적인 아버지와 남성의 기미를 느낀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문득문득 듬직해 보이고 왠지 대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가방 얘기를 하려다가 서론이 길어졌다. 남자의 액세서리는 몇 가지 되지 않고 그런 만큼 여자들은 모두 유심히 본다. 구두, 안경, 벨트, 시계.... 그 중에서도 가방은 남자의 살림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한 남자의 살림. 그가 스스로 먹고 살고, 세상의 인정을 받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꾸리는 그 남자의 살림은 그의 내면이자 그의 세계이다. 여자에게 있어 가방은 그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징하지만 그 내부는 아주 구체적인 생활을 반영한다. (여분의 스타킹에서 먹다만 샌드위치까지) 반면 남자에게 있어 가방은 여자의 핸드백이 가지는 상징성보단 취향(또는 몰취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아이템이다. 가방을 아예 들지 않는 사람이 있고, 마지못해 아무 것이나 드는 사람도 있다. 프라다나 투미 류의 검정 가방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RRL 류의 캔버스 천에 구깃구깃한 가죽을 덧댄 스타일을 선호하는 부류가 있다. 백화점에선 보테가 베네타나 고야르의 커다란 토트백을 들고 돌아다니는 남자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한편 가방의 내부는 여자의 그것보다 단출하고, 그 남자의 살림을 반영하는 몇 가지의 상징성 강한 아이템들이 차지하는 듯하다. 

조각가 안규철이 쓴 <그 남자의 가방>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가방 속에 예를 들어 어떤 천사가 내게 맡겨놓은 한 쌍의 날개가 들어있다고 주장하고 그 가방이 열리지 않으므로 그것을 보여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에 나는 그것을 가지고 비행기에 탈 수 있을까?" 우리는 가방의 내용을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방의 내용물을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것이 아니라면, 공항의 직원들 뿐 아니라 애인에게조차 이해될 수 있을까? 

얼마 전 여자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인상적이었던 남자의 가방 속 소지품에 대해 물었다. 한 친구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는 남자의 가방 속에 있던 줄자를, 한 친구는 회사 사장님의 분홍색 필통을, 한 친구는 옛 애인이 항상 갖고 다니던 문학과 지성사의 시집을, 나는 망원경을 들었다. 한 지인이 망원경을 갖고 다닌다고 했을 때 순간 관음증인가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갖고 다니는 망원경은 훔쳐보기의 기능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그보단 멀리보기의 기능인 것이다. 그 지인은 망원경으로 노을 속 무늬를 들여다보거나 길 건너 또는 강 건너를 본다고 했다. 저편 또는 건너편을 보기 위한 수단으로 망원경을 갖고 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남성성을 감지했다. 여자는 건너편보다는 내 손이 닿는 주변에 관심을 갖는다. 난 초봄 내내 조팝나무를 심고 허브를 가꾸는데 바빴다. 멀리 보는 망원경이란 남자의 살림이었고 이국적인 오브제였다. 

아무리 남자의 살림이라도 여자가 넘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남자에게서 보았을 때 어쩔 수 없이 더 멋진 것들이 있으니...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의 말처럼 "남자의 주된 덕목은 용기"이다. 용기란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최고로 중요한 덕목이지만 남성의 용기란 이를 테면 전쟁터의 그것이다. 나 같은 겁쟁이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 또는 연애 상황도 이보다 쉽지는 않다. 우물쭈물하는 여자의 마음을 확 돌릴만한 남자의 용기. 모든 여자가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판단력 역시 그러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내리는 칼 같이 정확하고 단호한 판단력도 내가 무한히 그리워하는 덕목이겠다. 그리고 리더쉽. 회사의 팀장이 되었든 부장이 되었든 국회의원이 되었든 골목대장이 되었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든 팀원을 다룰 줄 아는 리더가 매력 있다. 그리고 리더의 말을 기다리는 팀원들에게 미래의 비전을 바른 언어로 제시해줄 수 있는 남자. 윤기 자르르 흐르는 가방 속에 요즘 유행하는 곰살 맞은 오브제들도 좋겠지만 용기나 비전 한 줌은 어떨까. 도저히 상상조차 불가능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개를 실은 가방을 들고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 굳이 가방을 열어 설명하지 않아도 패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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